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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 설교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조회 수 616 추천 수 0 2015.11.18 09:38:12

성경 : 요한복음 1 : 1-5절

 

어떤 사람이 지나가는 사람들의 길을 막고 이렇게 물어봅니다.

"왜 사십니까?" "무엇 때문에 사십니까?" 그때 뭐라고 대답할 것 같습니까? 아마 대답보다는 미친 사람 취급하고 아래위를 한번 훑어보고는 그냥 지나쳐 버릴는지 모릅니다. 사실 이런 질문에 대해 우리는 대답할 준비가 잘 되어 있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왜 사는지? 내가 무엇 때문에 살아가고 있는지 별로 생각해본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대답할 말이 생각나지 않은 경우 대개는 우스갯소리로 자신은 '먹기 위해서 산다' 라고 말하며 얼버무리기도 합니다. 물론 어떤 거창한 이유를 대면서 자신이 사는 이유에 대해 밝히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대개는 자신이 왜 사는지, 무엇 때문에 살고 있는지 생각하지 않은 채, 그저 주어진 삶이기에 살아가고 있을 뿐이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좀 더 본질적인 문제로 '나는 도대체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던진다면 어떤 대답을 들을 수 있을 것 같습니까? 아니 여러분이라면 어떻게 대답하시겠습니까? 어떤 분은 오늘 제가 너무 어려운 질문을 한다고 생각하실는지 모르겠습니다. 며칠 감기를 좀 앓고 나시더니 철학자가 되셨나? 아니면 머리의 열이 아직 덜 식으셨나? 라고 말씀하실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이런 질문은 철학자만 던질 수 있는 질문이 아닙니다. 우리 모두가 본질적으로 던져보아야 할 질문입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왜 사는지에 대해서 생각을 하지 않듯이, 자신이 누구인지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는 경우도 대부분입니다.

기껏 이런 질문을 받았을 때 할 수 있는 대답은 자신의 본관은 어디며, 누구의 몇 대손이고, 자신의 가문 중에 어떤 분이 계셨고, 이런 정도로만 대답할 뿐입니다.

 

물론 그렇게 대답하는 것도 매우 중요합니다. 사실 어린 시절 보육원이나 기타 사회단체에 속한 시설에서 자라난 아이들의 고민이 무엇입니까? 자기의 정체성입니다. 도대체 나의 부모는 누구이며, 나는 어디서 태어났는지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어른이 되었을 때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고민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텔레비전 프로인 '아침마당'에 나와서 부모를 찾으려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자기의 정체성에 대한 고민을 해결하기 위해서입니다. 부모를 알아야 자기가 누구인지를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해외로 입양된 아이들이 성장하면서 자기의 부모를 찾고, 자신이 태어난 나라라고 해서 방문하는 것을 보면 부모가 누구이며, 내가 태어난 곳이 어디며, 어떤 가문에 속했는지를 아는 것은 중요한 문제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정체성은 부모가 누군지 알아야만 그 문제를 풀어나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 정도로도 자신이 누구인가? 에 대한 근본적이고도 본질적인 대답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왜 사람들은 자신이 누구이며, 왜 사는지에 대해 보다 근본적인 대답을 가지고 있지 못하는 것일까요? 그 이유는 한가지입니다. 인생의 주인이신 하나님과 그분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정확하게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우리 인생들을 여기에 있게 하셨고, 우리가 그분으로 인해 존재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분이 어떤 분이신지를 바르게 알면 우리는 이 질문에 대한 명확한 답을 얻을 수 있습니다.

 

사실 요한복음이 우리들에게 증언하고자 하는 내용이 바로 그것입니다. 즉 '예수는 누구인가?' 그리고 '하나님은 그분을 통해 무엇을 하려 하셨는가?'를 밝히고 있습니다. 사도요한은 그 부분에 대해 20장 31절에 이렇게 밝히고 있습니다.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사도 요한은 이 요한복음을 통해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우리로 하여금 그분을 믿어 생명을 얻게 하려고 이 복음서를 기록한다고 말했습니다. 사실 성경의 복음서를 두고 생각해볼 때, 마태마가복음 그리고 누가복음은 예수님의 생애에 있었던 사건들에 초점을 맞추어 기록되어진 반면, 요한복음은 이 사건들이 갖고 있는 의미가 무엇인지에 대해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예수님께서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5천명을 먹이신 사건은 사복음서에 모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마태, 마가, 누가는 사건에 대한 기록만 있습니다.

하지만 유독 요한복음에서만 그 기적적인 사건에 뒤이어 예수님께서 백성들에게 설명해 주신 '생명의 떡'에 관한 설교를 기록해 놓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러니까 오병이어 사건이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를 밝혀 놓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요한복음 전체에 흐르는 한가지 주제는 사도요한이 밝히고 있는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것과 만일 우리가 그분을 믿고 받아들이면 영생을 소유하게 될 것이라는 점입니다.

 

그래서 사도요한은 요한복음의 첫머리에서부터 예수그리스도가 누구이신가? 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1절을 보면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요한은 예수님을 소개할 때 처음부터 그분을 '하나님'이라고 소개하지 않고 '말씀'으로 소개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왜 예수님을 '하나님'이라고 소개하지 않고 '말씀'이라고 소개하고 있는 것일까요?

 

사람이 자신의 마음과 생각을 전달하거나 나타내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그 중에 하나는 행동입니다. 가령 예를 들어 연극의 한 형식가운데 '판토마임'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판토마임이란, 대사는 한 마디도 하지 않고 표정이나 몸짓만으로 사상이나 감정을 나타내는 연극의 한 형식을 가리킵니다. 이 판토마임의 대표적인 배우로는 우리에게 너무도 잘 알려져 있는 찰리 채플린과 마르셀 마르소 같은 사람이 있습니다. 이들은 극 중에 일체 말을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몸짓 하나만으로도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관객들에게 잘 전달합니다.

그러나 또 다른 하나는 '말'입니다. 대개의 사람들은 '말'로서 자신의 마음과 생각을 다른 사람에게 나타내 보입니다. 대화를 해보면 그 사람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그리고 지금 마음의 상태는 어떠한지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누군가 말하기를 '말은 마음의 창'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요한복음을 보면 예수님이 누구인가?를 소개하는 첫 장면에서 '말씀'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왜 요한은 예수님을 그렇게 표현한 것일까요?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뜻과 생각을 우리에게 나타내 보이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모든 생각과 계획을 예수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나타내셨습니다. 그래서 그분을 가리켜 '말씀'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말씀은 태초부터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이 말씀은 어떤 철학자들이 오랜 연구를 거듭한 끝에 발견해 낸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실험실에서 수년간 연구를 거듭한 끝에 찾아낸 실험의 결과가 아니란 말입니다. 또 이천년 전에 이 땅에 와서 33년의 짧은 인생을 살다가 위대한 몇 마디의 말을 남기고 이 세상을 훌쩍 떠나가 버린 그런 정도의 분이 아니란 말입니다. 그분은 태초로부터 있었습니다. 물론 어떻게 해서 그분이 태초부터 계시게 되었는지 알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굳이 설명하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마치 모세가 천지창조의 기사를 쓸 때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고 말했던 것과 너무도 동일합니다.

모세는 태초에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셨다고만 말하지 그분이 어떻게 해서계시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분이 계신 것은 너무도 당연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분이 어떻게 해서 계시게 되었는지 설명하는 것은 오히려 그분의 존재자체를 의심하는 것과 같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분이 어떻게 해서 계시게 되었는지가 증명되어진다면 그분은 창조주가 아니라 피조물이 되고 맙니다.

 

그래서 요한은 예수에 대해 거듭 밝히고 있는 내용이 이것입니다. 2절과 3절에 보면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고 했습니다. 그분은 하나님과 함께 계셨습니다.

 

우리는 여기서도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을 만나게 됩니다. 분명히 1절에서는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라고 했습니다. 즉 예수가 하나님이란 말입니다. 그런데 2절에서는 하나님과 함께 있었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어느 말이 맞습니까? 예수가 하나님입니까? 아닙니까? '하나님'이 맞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과 함께 있었다는 것은 또 어떻게 이해를 해야 합니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성경은 우리의 이해를 돕기 위해 이것저것을 예를 들어 설명하거나 그것을 증명해 보이기 위해 또 다른 어떤 것을 끌어들이고 있지 않다는 점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로 하여금 모든 것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도록 요청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분명한 것은 예수가 하나님이신 것은 사실이지만 성부하나님과는 구별되어진 분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두 분이십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은 한 분이십니다. 그래서 삼위일체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태초에 계시면서 무엇을 하셨습니까? 본문에 기록되어진 대로 천지를 창조하시는 일에 동참을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는 결코 피조물이 아니라 창조주라는 사실을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왜 요한은 예수가 창조주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굳이 여기서 말하려는 것일까요?

 

사랑하는 가주갈보리교회 성도 여러분!

곡예사와 마술사의 공통점과 차이점이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공통점은 고도의 훈련을 통해 되어진다는 점입니다. 곡예사든 마술사든 훈련의 과정을 거치지 않고는 될 수가 없습니다. 하루에도 똑같은 동작을 수백번 수천번씩 반복하는 과정을 거쳐 곡예사가 되고 마술사가 됩니다. 그런데 두사람의 차이가 무엇이겠습니까? 마술사의 훈련은 사람들의 눈을 속이는데 있다는 것입니다.

 

즉 그들이 만들어 내는 것은 실제로 그 자리에서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만들어진 것을 사람들의 눈에 보이지 않게 감추어 두었다가 고도의 빠른 손동작을 통해 그것을 끄집어내는 것뿐입니다. 그들이 만들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이미 만들어진 것을 어느 순간에 보여주는 것뿐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인간의 한계이기도 합니다.

사람들은 큰소리를 치지만 어느 것 하나 무로부터 창조해 낼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사람들이 만들었다고 하는 것은 대개 이미 존재하는 것을 가지고 새롭게 변형시키거나 발전적으로 바꾸어 놓은 것에 불과합니다.

 

사람들은 하늘을 나르는 비행기를 만들 수 있고, 바다아래를 다니는 잠수함을 만들 수 있습니다. 먼 우주를 오가는 우주비행선을 만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무에서 유를 창조한 것이 아니라 유에서 유를 발전시키고 변형시킨 것뿐입니다.

 

그러므로 만약 예수가 창조주가 아니라면 그는 마술사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아니 우리와 같은 피조물일 수밖에 없고 그를 통해서 인류의 구원이라는 역사를 이루어낼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요한은 그분이 태초부터 계셨을 뿐 아니라 태초의 창조사역에 동참하신 창조주이심을 밝히고 있습니다. 그래서 지은 것이 하나도 그분 없이 된 것이 없다고 말씀합니다.

 

참 그렇습니다. 모든 지어진 것이 그분을 통해서입니다. 밤하늘을 아름답게 수놓은 별들이 그분의 솜씨입니다. 웅장한 산들과 바다와 강 모두가 그분의 작품입니다. 그 위를 헤치고 다니는 수많은 물고기들과 동물들 이 모든 것이 그분의 작품입니다. 무엇보다 저와 여러분이 그분의 솜씨이며, 작품들입니다.

 

예술 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작품에 자신의 혼을 심는다고 말합니다. 그만큼 그 작품에 온갖 열정을 다 쏟는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하나의 작품으로 태어났을 때 작가는 그 작품을 통해 만족과 기쁨을 얻게 됩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 부으셔서 만드신 위대한 작품이며 솜씨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왜 우리가 그분의 위대한 작품입니까?

 

그 분이 우리를 만드실 때 어떻게 만드셨다고 했습니까? 일찍이 말씀하시기를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하나님의 모양대로 지음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다시 말씀드려서 우리는 그분의 닮은꼴로 만들어졌습니다. 자식이 부모를 닮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입니다. 그런데 닮았다는 것만으로는 부모에게 기쁨이 될 수 없습니다.

 

부모의 모습을 닮은 자녀들이 부모의 마음에 상처를 주거나 기대에 어긋나는 행동을 하면 '닮았다'는 것이 오히려 그 부모에게는 욕이 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하나님의 닮은꼴이라는 말은 단순히 외형적으로 닮았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성품, 하나님의 인격을 닮아야 한다는 말인데 과연 우리가 그 말에 부끄럽지 않을 만큼 인격이 형성되어 있고 그 인격에 알맞는 행동과 삶이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분은 모든 만물의 주인이십니다. 아니 만물의 중심에 그분이 계십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삶이 진정한 의미를 찾고자 한다면 그분이 우리의 삶의 중심에 있어야 한다는 것은 너무도 자명한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그분 없이 되어진 것은 아무것도 없기 때문입니다. 출판사에서 책을 발간한 뒤에 작가와 독자의 만남을 주선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작가와의 만남을 통해 그 책 안에 있는 더 깊은 세계를 이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인생의 참된 의미를 발견하려면 인생의 주인이 되신 그분을 만나야 합니다. 만날 뿐 아니라 내 삶의 중심에 계시도록 해야 합니다. 그분이 없이는 되어진 것이 아무것도 없기 때문에 그분이 계셔야만 하고, 계시되 항상 중심에 계실 때에만 참 의미를 찾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많은 사람들이 그분을 삶의 중심에 모시려고 하지 않고 엉뚱한 것으로 그 중심 되는 자리에 앉히려 한다는 점입니다.

 

사랑하는 가주갈보리교회 성도 여러분!

예수그리스도가 중심에 없는 삶은 죽은 삶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살았으되 진정으로 살아있다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생명이 그분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요한은 4절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여기에 보면 생명이 그 분 안에 있다고 말했습니다. 물론 우리에게도 생명은 있습니다. 우리가 호흡하는 것 자체가 생명이 있다는 증거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것은 단순히 그런 의미에서의 생명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가진 생명은 우리 혼자만으로 만족해야만 하는 생명입니다.

그리고 어느 순간이 되면 끝이 나게 되는 생명입니다. 유한한 가치로서의 생명입니다. 그러기에 다른 사람에게 나누어주거나 남을 살릴 수 있는 그런 생명이 아닙니다.

물론 우리도 경우에 따라서 남을 살릴 수 있습니다. 만성 신부전증으로 고생하는 사람에게 자신의 신장을 기증해서 새 생명을 얻게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뇌사상태에 있는 사람의 장기 이식을 통해 죽어가는 생명을 살린 예도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근본적으로 사람을 살릴 수 있는 생명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육신적 생명은 한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것은 육신적 생명의 연장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의미에서의 생명이라면 의사를 통해서도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아니 굳이 의사를 통하지 않아도 몇 가지 사실만 알아도 가능합니다. 예를 들어 어제와 그저께 텔레비전에서 '잘 먹고 잘 사는 법'이라는 제목 하에 프로그램이 방영되었습니다.

 

어제 내용은 보지 못했지만 그저께 내용을 통해서 볼 때 우리의 식생활 개선만으로도 얼마든지 생명을 연장시킬 수 있다는 연구결과가 있었습니다.

 

물론 믿음이 좋은 사람들은 생명의 근원이 하나님께 달려있는데 어떻게 그렇게 말할 수 있느냐?고 반문하실지 모르겠습니다. 물론 생명의 근원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노력으로 그 생명을 연장될 수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것은 그런 생명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안에 생명이 있다는 것은 '영생'에 관한 말씀입니다. '영원한 생명'이 그분 안에 있다는 말입니다.

왜 우리들에게 그 영원한 생명이 필요합니까? 우리가 결국은 모두가 멸망 받을 존재들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최초의 사람 아담과 하와의 범죄는 모든 인류에게 죽음과 멸망을 가져다 주었습니다. 그러므로 죄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한 우리에게 영생은 없습니다. 죽어가는 생명을 살릴 수 있는 생명을 말합니다.

생명의 연장이 아니라 영원토록 사는 '영원한 생명'이 그분 안에 있다고 했습니다.

 

때때로 사람들은 자신이 주일날 교회에 나온다는 것으로 만족하는 경향들이 있습니다. 또는 자신이 교회에서 봉사하고 있다는 것 때문에 교회 내에서 자신의 삶에 대해 대단한 자부심을 느끼기도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교회 나오는 것만으로는 안됩니다. 봉사하는 것 만으로도 안됩니다. 선행을 쌓는 것 만으로도 안됩니다. 교회에서 어떤 직분을 가졌다는 것만으로도 안됩니다.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을 소유했느냐? 하는 것입니다.

 

왜 많은 사람들이 신앙생활을 질질 끌려 다니듯이 그렇게 감당하고 있는 줄 아십니까? 왜 자발적이지 못하고 그의 반강제적인 형태의 모습으로 어쩔 수 없이 교회에 나오는 줄 아십니까? 내 삶을 전적으로 그분께 드리지 못하고 적당한 선에서 머물러 있으려 하는지 아십니까? 어쩌면 그 사람이 아직도 생명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지 못했기 때문일는지 모릅니다. 아니 그 분 안에 들어와 있지 않기 때문일 수 있습니다. 생명이 무엇입니까? 생명은 살아서 꿈틀거리는 것입니다.

생명이 있는 사람의 특징은 시체처럼 가만히 있을 수 없다는 점입니다. 움직이려 합니다. 움직이지 않으면 갑갑해서 견딜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살아있다는 증거입니다. 내 안에 생명이 있다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말씀이 들려질 때, 내 가슴을 찢으며 크게 울부짖고 싶습니다. 말씀이 들려질 때, 그 말씀의 주인이 되신 그분 앞에 내 삶을 결단하고 싶어집니다. 아니 그분이 원하시는 것이라면 기꺼이 순종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마음이 용솟음 칩니다. 그것이 생명이 있다는 증거입니다.

 

수가성에서 예수님을 만난 사마리아 여인을 기억하십니까? 그녀가 메시야를 만났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어떻게 했습니까? 그녀는 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네에 내려가서 '와보라'고 외쳤습니다. 가만히 우물가에서 물을 긷고 있을 수만 없었습니다. 그 안에 꿈틀거리고 있는 생명 때문에 가만히 있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단숨에 동네로 내려갔던 것입니다. 정말 내 안에 생명이 있다면 가만히 있을 수 없습니다. 움직여야 합니다. 꿈틀거려야 합니다.

 

그런데 요한은 그 생명이 빛으로 나타났다고 했습니다. 왜 생명이 빛으로 나타났습니까? 어두움을 밝히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5절에도 말씀하기를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라고 했습니다. 빛의 역할은 어두움에 비춰서 어두움을 물리치는 것입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정작 어두움이 그 빛을 깨닫지 못했다고 했습니다. 왜 빛이 비춰졌는데 어두움은 그 빛을 깨닫지 못했던 것일까요? 빛의 강도가 약해서 깨닫지 못한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아무리 작은 빛이라 해도 어두움 속에 들어가면 그 빛은 빛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왜 어두움이 깨닫지 못한 것입니까? 그것은 결국 자신들의 아집 때문입니다. 아니 어두움에 머물러 있고 싶어 하는 인간의 부패한 마음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빛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질 때 그 말씀 앞에서 자신을 돌아보고 결단하기보다는 핑계가 많고 이유가 많습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어두움으로 빛을 가리고 있습니다. 아직도 자신의 고집대로 살고 싶어 하고 자신이 원하는 쪽으로 나아가기를 바랄 뿐입니다. 빛이 들어오면 청산해야 할 것이 많아집니다. 자신이 정욕을 청산해야 하고, 자신의 탐심을 청산해야 하고 자신의 바르지 못한 생활을 청산해야 합니다. 그런데 청산하지 않고 그대로 가지고 있으려 합니다.

 

빛이 강도가 약해서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어두움 스스로 빛을 거부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나 어두움에 머물러 있는 것들을 청산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영생을 얻을 수 없습니다. 그 분안에 있는 생명을 소유할 수 없습니다.

 

컴퓨터 안에 휴지통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휴지통은 필요없는 파일을 그곳에 버리기 위해 만들어 놓은 장소입니다. 휴지통에 버려야 할 것을 버리지 않고 두면 컴퓨터 속도가 느려집니다. 어느 순간 불필요한 것들 때문에 컴퓨터가 먹통이 되어버릴 때도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생활,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두움에 속해 있는 것들은 과감하게 버리고 청산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어느 순간 우리도 완전히 다운되는 것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가주갈보리교회 성도 여러분!

빛과 더불어 빛 안에서 걸어가시는 것이 부담되십니까? 빛과 함께 행하시는 것이 두려우십니까? 그래서 어두움에 머물러 있고 싶고, 죄 가운데 서성이고 싶으십니까? 그곳엔 영원한 생명이 없습니다. 영원한 안식도 없습니다. 영원한 천국도 없습니다.

이제 빛 가운데로 나오시는 여러분이 되시길 바랍니다. 생명의 말씀을 소유하시는 여러분이 되시길 바랍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셨습니다. 그 말씀은 우리와 함께 계셨습니다. 말씀이 내 삶의 앞길을 비출 때 조금은 어려워 보여도 순종하시는 여러분이 되시길 바랍니다. 다음주일은 성령강림절입니다.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말씀이 내 삶 속에 찾아올 때 조금은 힘들어 보여도 말씀에 의지하여 빛 가운데로 나올 때, 여러분의 삶은 찬란하게 빛나게 될 것이며 크신 축복을 받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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