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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사님 칼럼

제목 南北 절대 권력자의 권력 크기 같아졌다

조회 수 38402 추천 수 0 2020.05.08 08:16:50

'절대 권력'에 기대서 숨 쉬는 민주주의는 가짜 민주주의

전파가 '권력의 재산'인 줄 알고 독립 방송 위협하는 정권

 

'절대 권력'은 자신의 행동이 옳은가 그른가에 대한 최종 심판권을 자기가 쥐고 있는 권력이다. '절대 권력'은 항상 자기 자신에게 무죄(無罪)를 선고할 수 있다. 뒤집으면 자기를 비판하거나 반대하는 세력엔 언제라도 유죄(有罪) 판결을 내릴 수 있는 권력이다. 비판 세력과 반대 세력을 지워버린 '절대 권력'은 예외 없이 부패·타락·추락의 길을 걸었다. 국가 역시 쇠퇴(衰退)와 혼란의 내리막길을 굴러갔다.

 

근대 민주주의 설계자들이 '절대 권력'의 등장을 막기 위해 고심(苦心)을 거듭했던 것도 이 때문이다. 고심의 결과가 국가 권력을 여러 부문으로 나눠 상호 견제·감시토록 하는 권력 분립 시스템이다. 국민이 투표로 뽑은 '선출된 권력(대통령과 의회)'이 서로 견제토록 하고, '임명된 권력(대법원과 헌법재판소)'에도 독립성을 부여해 '선출된 권력'의 독단(獨斷)을 억제하도록 했다.

 

미국의 경우는 대통령 손발에 수십 개의 자물쇠를 더 채웠다. 최고재판소 판사는 종신직(終身職)이라 대통령 마음대로 내 편으로 갈아 끼울 수 없다. 대통령비서실 이외의 고위직은 인사청문회를 반드시 통과해야 한다. 대통령 임기의 허리 근처에 중간선거를 둬 대통령의 고집대로 정책을 밀어붙이기 어렵다. 대통령의 권력 제한에 따른 비효율과 부작용도 크다. 미국의 설계자들은 '절대 권력'을 가진 독재자의 출현을 봉쇄하기 위해선 이런 정치적 비용(費用)은 감수할 수밖에 없다고 각오했다.

 

문재인 대통령은 4·15 총선을 통해 '절대 권력'으로 등장했다. 1948년 정부 수립 이후 우리가 마주친 두 번째 '절대 권력'이다. '역사의 어리석은 사태는 두 번 되풀이된다. 한 번은 비극의 형태로, 다른 한 번은 희극의 형태로'라던 어느 철학자의 말은 옳았다. 첫 번째 '절대 권력'1972년 탱크가 국회의사당을 포위한 가운데 '유신(維新) 대통령'이란 모습으로 등장했다. 이승만 시대는 독재도 아니었다. 자유당 정권은 집권 기간 내내 '강력한 리더'가 이끄는 '강력한 야당'을 상대해야 했다. 국회에서 법안 하나를 처리하려면 온갖 무리수를 동원해야 했다.

 

두 번째 '절대 권력'의 출현이 희극인 것은 그것이 쿠데타가 아닌 선거의 문()을 통과해서 등장했기 때문이다. 물론 하늘에선 가구마다 100만원을 지급한다는 약속이 함박눈처럼 쏟아지고, 땅 위에선 대통령이 전국을 돌며 '현지지도'하는 유례 없는 강행군 일정을 밀고 나가는 가운데 치러진 선거이긴 했다.

 

국민이 투표로 '절대 권력'을 불러들인 사태는 드문 일이 아니다. 독일 국민은 1932년 총선을 통해 '히틀러당()'을 다수당으로 만들어 주었다. 포퓰리즘 정책으로 나라를 몇 번씩 거덜낸 그리스 파판드레우 정권, 아르헨티나 페론 정권, 베네수엘라 차베스 정권도 국민의 초대를 받은 정권이었다.

 

문재인 '절대 권력'의 등장은 우연이 아니다. 영화 '기생충'의 대사대로 '너는 계획이 다 있었구나'. 대통령이 손가락으로 건드리자마자 헌법기관들이 줄줄이 무너졌다. 권력과 뜻을 통한 내응(內應) 세력들이 안에서 대문 빗장을 따줬기 때문이다. 대법원·헌법재판소·중앙선관위가 그렇게 뒤로 자빠졌다. 국세청·공정거래위·경찰은 원래가 깔고 앉은 정권 차지였다. '권력의 적()'으로 공격받는 검찰도 출발은 '권력의 검찰'이었다. 고위공직자비리수사처가 발족하면 문재인 '절대 권력' 체제가 완성된다. 이제 남북 절대 권력자의 권력 크기는 같다. 북쪽엔 있고 남쪽에 없는 것은 김정은의 즉결처형권(卽決處刑權) 정도일까.

 

권력을 비판하는 언론도 몇 남지 않았다. 거의가 '대통령의 진리(眞理)'를 전파하는 일에 바쁘다. ()소련 집권당 기관지의 제호(題號)'진리(러시아어로 프라우다)'였다. 정부가 방송의 인허가권을 쥐고 있는 명분은 '전파가 공공(公共)의 재산'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실제론 '전파는 권력의 재산'이란 잣대로 권력을 비판하는 방송의 목을 조르고 있다.

 

나라의 방위를 '적의 선의(善意)'에만 내맡기는 국가는 더 이상 국가가 아니다. 그렇듯 '절대 권력자의 호의(好意)'에 기대야만 숨을 쉴 수 있는 민주주의는 더 이상 민주주의가 아니다. 한국 민주주의는 이 위태위태한 경계선을 밟고 서 있다. 어느 독일 시인은 자기가 살아낸 '절대 권력 시대'를 이렇게 적었다. '물론 나는 잘 안다/순전히 운이 좋아/그 많은 친구와 달리 내가 살아남았다는 것을.' 우리를 기다리는 시대의 풍경이 이것과 얼마나 다르다 할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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