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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소식

현대신학

조회 수 774 추천 수 0 2015.11.18 13:48:48

실천 신학의 정의

 

현대 신학은 실천으로부터 나온다. 뒤집어서 말하면, 실천을 위하여 신학은 존재한다. 그러나 이 말은 역사적으로 많은 오해를 불러일으켰고, 지금도 그 의미가 충분히 전달 되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그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유인대학 신학생들은 지금부터 실천신학의 광맥을 찾아 새롭게 길을 떠나되, 어두운 굴속을 파 들어가는 광부들이 모자 앞에 달린 전조등의 도움을 받는 것처럼, ‘신학의 실천이라는 대전제 아래 탐구를 해가야 할 것이다. 실천신학의 기존 틀이, 각 신학 분야의 상호 작용을 전제로 한 하나의 장르로서, 아니 이 큰 장르 안의 한 유형으로서, 신학실천의 빛을 받아 다시 짜여질 필요가 여기에 있다고 하겠다.

 

1) 하나님의 실천

 

실천신학은, 우리가 그 동안 이해해 온 바에 따르면, 학문으로서 신학의 한 부분이다. 그리고 그것은 일반적으로 교회의 역사적 형태와 교회 안에 있는 그리스도인의 공동체적 삶에 대한 책임의 근거를 다루는 것으로 규정된다. 다시 말해서, 한편으로는 교회의 본질과 목적을 성취하는 실제적인 방법을 모색하는 것을 그 과제로 삼아왔다는 점에서, 조직신학과 윤리학에 가까운 학문영역으로 이해되었다. 다른 한편으로는, 목회자에게 목회의 지침과 방법을 전수하는 데 강조 점을 둠으로써 지식보다는 능력으로서 이해되었다. 실천신학에 대한 이런 두 가지 시각은 지금까지 대변되고 있다. 예를 들면, 보렌(R. Bohren)은 실천신학을 하나님의 보내심에 참여하는 교회에 대한 학문으로 규정했고, 칼 라너(K. Rahner)교회의 실천적인 집행을 그 대상으로 규정했다. 교회의 학문으로서, 실천신학이 이런 두 가지 측면의 목적과 과제를 수행해야 한다는 것을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러나 실천신학에 대한 이런 규정은 대단히 협소한 정의라고 하겠다. 교회가 그 안에 있고, 또 그 안으로 보내심을 받은 세계와의 관련성에서 신학을 한다고 할 때, 실천신학의 지평은 교회의 울타리를 넘어 세계로 확대될 수밖에 없다. 더구나 신학을 목회자의 전유물이 아니라 평신도신학의 빛에서 이해할 때 실천신학은 세계 안에서 그리스도교적 삶을 실천하는 그리스도인들의 신학이기도 하다.

 

실천신학은 다른 신학과목과 관련하여 오해를 받아왔다. 실천신학은 신학이론을 실천과 연결시키는 기술적 영역이 아니다. 이론과 실천의 관계를 맺게 하는 데 실천신학의 초점이 있는 것이 아니다. 강조 점은 프락시스’(Praxis)에 놓여있다. 프락시스는 하나님의 구원행위, ‘하나님의 선교에 대한 참여이다. 신학은 바로 이 하나님의 선교사건을 성찰하고 증언하는 과제를 가진다. 그러므로 엄밀한 뜻에서 하나님의 실천이 신학의 모태이고, 모든 신학은 실천신학이라고 하겠다. 이런 뜻에서 전통적인 학과로서의 실천신학신학 실천의 시각에서 끊임없이 조명을 받아야 한다. 실천신학의 대상과 목적과 방법을 하나님의 선교의 빛에서 검토하는 신학 실천이다. 실천신학의 새로운 지평은 바로 신학 실천의 빛에서 실천신학을 재구성할 때 비로소 열릴 수 있다.

 

2) 교회의 참여

 

신학은 교회의 존재 양식을 두 가지 측면에서 다룬다. 교회는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증인으로 부름받았고 동시에 그리스도의 구원 역사를 증거 하라고 세상으로 보냄받았다. 곧 부름 받은 사실이 교회의 존재 근거요, 존재 방식인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 나라의 화신이요, 그분의 삶이 하나님 나라의 역사라는 것이 성서의 증언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로 부름 받은 이들의 공동체는 당연히 스스로의 삶 속에서 하나님 나라의 모습을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표징 공동체여야 한다. 하나님 나라의 표징으로서 부름 받은 사람들은 동시에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구체적으로 실천하고 증언하는 삶의 공동체로 보냄을 받는다.

 

부름 받은 사실과 보냄 받은 사실, 표징으로서의 공동체와 증언하는 삶의 공동체는 결코 분리될 수 없다. 그것은 하나님 나라의 화신인 그리스도의 인격이 그 나라를 몸소 실천한 그리스도의 삶과 유리 될 수 없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인격과 삶에 표출된 하나님 나라는 기본적으로 개념이 아니라 동적인 사건이다. 여기서 사건이라는 말을 우리는 스락시스라 바꿔 쓸 수 있다. 사건 또는 프락시스는 교회가 주도하거나 수행하는 일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을 통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행하시는 하나님 자신의 구원 사건이요, 구원의 프락시스를 뜻한다.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의 선교’ Missio Dei라고 할 것이다. 교회는 바로 이런 하나님의 선교에 동참한다는 뜻에서 부름 받은 표징이요, 보냄 받은 증언의 삶을 사는 것이다.

이런 뜻에서 교회는 프락시스의 구현체요, 신학은 프락시스의 이론이라고 하겠다. ‘실천신학은 하나님의 선교라는 하나님의 프락시스에 동참하는 교회의 프락시스에 동참하는 교회 프락시스를 신학적으로 해명하고 입증하는 학문이다. 따라서 교회의 프락시스는 하나님 나라의 도구로서의 프락시스요, 도구의 힘은 성령의 역사이다. 그렇다면 실천신학을 다음과 같이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실천신학은 부름 받고 보냄 받은 교회를 다루는 학문이다. 교회를 향한 그리고 교회를 통한 성령과 말씀은 교회를 불러모아 세계로 내보낸다. 그러므로 실천신학은 하나님의 선교에 대한 교회, 특히 현재 교회의 참여를 다루는 학문이다.

3) 세계를 위하여, 세계와 더불어

 

바로 이런 점에서 실천신학은 신학 전체와 관련하여 설명되고 현실을 맺을 수 있는 자리는 교회와 세계이다. 실천신학의 결실의 자리를 교회와 세계로 규정할 때, 교회와 세계의 상호 관계를 어떻게 규정하느냐에 따라 실천신학의 본질과 기능이 드러난다. 교회는 세상에 보냄 받은 한, 세상의 현실 속에 몸담고 산다. 이것이 곧 교회의 사회적, 세계 내재적 모습이다. 따라서 실천신학은 세계와 사회의 현실을 신학적으로 분석하며 신학의 과제로 삼는다.

 

그것은 곧 하나님의 선교라는 하나님의 프락시스의 장이 바로 이 세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말이 현실의 세계, 또는 존재하는 세계 그대로를 정당화하며 거기에 참여하는 것을 뜻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이것은 하나님 나라의 빛에서 하나님의 나라에 상응하는 구원받은 세계를 위하여, 구원받지 못한 세계를 개혁하고 갱신하는 일에 교회가 어떻게 참여할 수 있는가를 실천신학이 문제삼는다는 말이다. 곧 세계를 하나님의 나라로 변혁하고 갱신하는 하나님의 프락시스에 교회가 참여하는 것이며, 따라서 실천신학은 세계에 대한 교회의 예언자적 참여 문제를 학문의 대상으로 삼는다. 이런 예언자적 참여가 가능하고 또 필연적인 이유는, 교회가 세상에 몸담고 있으나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는 존재론 때문이다. 곧 교회는 세계 정신이나 세계의 사회 현실이 형성해낸 산물이 아니라,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공동체인 것이다. 이 말은 곧 교회의 정체성이 종말론적 공동체로서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다는 말이다. 여기에 교회의 도구적 성격이 있다. 교회는 종말론적인 하나님의 나라의 역사적 표징으로서 세상 속에 몸담고 세상의 구원을 위하여 일해야 한다. 교회가 이런 종말론적 공동체로서 자기 정체성을 구체화하는 직업을 학문적으로 돕는 데 실천신학의 임무가 있다.

 

그러나 있는 그대로의 세계가 곧 하나님 나라에 상응하는 세계가 아니듯이, 하나님 나라의 역사적 표징인 교회가 곧 하나님의 나라는 아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프락시스 도구인 교회 역시 늘 스스로를 개혁하는 교회 ekkesia semper refomanda일 때 비로서 참다운 도구로서의 공동체일 수 있다. 다시 말해서, 교회는 하나님의 나라 자체가 아니라 그 나라를 역사적으로 구현하는 삶의 과정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세계를 위한 교회의 선교와 봉사는 교회 자체가 갱신과 분리될 수 있다.

 

교회가 세계로 보냄을 받은 한, 교회는 세계를 위해서존재한다. 그것은 세계를 구원하기 위하여 아버지가 아들을 보내시고, 아들은 자기의 증인으로 또 대역 자로 교회를 보내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세계를 위하여 선교하고 봉사하는 교회의 프락시스는 그리스도의 하나님 나라 프락시스에 동참하는 존재 방식이다. 따라서 있는 그대로의 세계를 정당화하거나 존속시키는 수단이 아니라, 약속된 세계로 변혁을 추구하는 행동 양식이 된다. 세계를 위하여 일한다는 것은 궁극적으로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일하는 것이고, 동시에 세계의 변혁을 위하여 일한다는 것을 뜻한다. 이런 점에서 교회는 타인을 위하여 존재할 때만이 교회일 수 있다는 본회퍼의 주장은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타인을 위한삶의 프락시스는 동시에 타인과 더불어살아가는 모범적 삶의 프락시스여야 한다. 더불어의 삶이 동반되지 않으면 타인은 객체화되거나 지배의 대상으로 전락할 수 있다. 그리스도가 보이신 모범적인 삶이란, 세계를 구원하기 위하여 가난한 이로 태어나 가난한 사람들 가운데 사시고(고후 8 : 9), 그들에게 하나님의 나라를 약속하신(4 :18-19) 삶이다.

 

그리스도의 하나님 나라 프락시스는 모든 인류의 구원을 위한 우주적이고 보편적인 목적을 지닌 것이지만, 그 방법은 구체적이고 특수한 것이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는 이 땅에서 짓밟힌 사람들, 박해 당하는 사람들, 가난한 사람들을 통하여 일하신다는 것이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너라”(16 : 24)는 이 말씀은,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가 하나님 나라의 역사적 표징인지 아닌지를 측정할 수 있는 기준이, 과연 교회가 짓밟히고 박해 당하고 가난한 사람들과 더불어살아가는지에 달려있다는 것을 뜻한다.

 

 

 

 

 

 

 

 

1. 현대 신학 사상에의 접근 방법

(Approacches to the Modern Theology and its Methodogy)

 

1) 시대적 상황성과 신학적 내용성 이 두 관계의 적절한 이의 중요성에 대하여

 

모든 인물들이나 사상들은 시대의 산물이라는 평범한 생각을 하게된다. 우리들의 논의는 그리 어려운 것이 아닐 것이다. 사상들의 관계성은 그 배경을 철저히 연구하면 서로 적절한 대응관계나 상관 관계를 갖게된다.

 

현대 사상의 배경 연구(Backgronnd Study)야 말로 모든 신학 사상을 포괄적으로 이해하는 길로 사상의 근원 내지 다른 사상과의 관련성을 밝히고자 한다.

 

그러나 모든 사상은 시대의 산물이라는 평범한 말을 다시 한 번 상기할 필요가 있다. 하나의 사상이 시대의 흐름에서 나온 것이던, 또는 시대를 거슬러 나온 것이던 간에 사상간의 맥을 상실해서는 안 된다. 신학을 연구함에 있어서 신학을 비롯한 모든 사상은 그 내용이 늘 상황 속에서 잉태되었다.

 

따라서 신학이 상황을 점검하고 비판하는 역할을 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상황이 당대의 신학을 해명하는 계기도 된다. 신학은 그 스스로의 진리 성을 지닌 채 시대를 선도하거나 어떤 상황에서 발생하는 사상을 점검하는 분명한 등대로 소의 토대가 되어야 함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고 할 것이다.

 

한 편으로 볼 때는, 시대나 상황은 문제를 발생케 하고. 이에 대하여 신학은 그 문제에 대한 해명을 하는 방식이 되기도 하며, 또 다른 한편으로는 신학이 시대를 점검, 비평하면서 상황을 극복해 나가는 방식이 되기도 한다. 어떤 면에서 볼 때, 신학적 자유 주의자들이 추구하는 바 시대적 상황에 맞춰서 문제를 제기하고 이에 대한 신속한 해명을 촉구하거나 대안을 제시하고자 함에 신학적 보수주의는 그들에게 빛을 지고 있을지도 모른다.

 

이러한 경향을 전통적 기독교에 서있는 보수주의 신학이 최근에 일어난 역사성의 문제나 인간 실존의 문제에 대하여 뒤늦게 반응을 보이는 태도에서도 쉽게 읽을 수 있다. 물론 이러한 예들은 현대에 와서 역사의 문제나 인간 실존의 문제뿐만 아니라 종말과 관련된 문제들, 더 나아가 시대의 정치적 상황이나 선교적차원의 문제까지 이르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러한 경향은 비록 현대 신학에 대하여 곱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보는 보수주의적 측면의 입장이 있다해도 결코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라고 판단된다.

 

현대(modern)라는 말이 어떠한 양상을 띄고 있던 간에, 시대 및 상황성을 벗어난 채 살아갈 수는 없는 형편이요, 따라서 그런 면에서 볼 때 보수주의(Conservatism)라는 말은 개혁주의라는 용어와 그 내용으로서 시대의 상황성을 극복해 나가야 할 것이다. 현대를 이해함에 있어서는, 중세의 긴 과정을 벗어나 소위 계몽이라 이름지어진 새로운 흐름을 이해하지 않고서는 그 이해가 불가능하다.

 

이것은 신적 중심의 초월성에 강조를 두었던 전통적 기독교가 소위 인간 이성중심의 내재성의 종교로 변하는 전환점을 이루게 되기 때문이다. 계몽의 이름 하에서, 창조와 섭리 속에서 초월적 존재로 이해되었던 절대자 하나님 중심의 세계관은 피조된 인간과 세계 중심으로 그 축이 전환되는 계기가 이루어 진 것이다. 이것은 신학뿐만 아니라 철학의 경향에서도 뚜렷한 추세다. 기독교 철학자 도이베르트(Herman Dooyeweerd)가 지적하듯이, 현대에 와서 모든 것이 인간 중심의 내재성으로 사상의 축이 전환되었음을 알 수 있다.

 

신학의 시대적, 상황적 적응에는 계시적 전통을 왜곡케 하는 부정적인 측면이 있기도 하지만, 성경의 의미를 재발견하거나 그 의미를 새롭게 강조하므로서 신학이 단순한 면제적 진술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주어진 말씀의 상황적 적용이라는 요소를 강하게 하는 긍정적인 측면이 있음을 역시 간과해서는 안 된다. 그런고로 신학을 이해함에 있어서 상황성의 이해는 매우 중요한 열쇠가 된다. 예컨대, 바르트(K. Barth)의 신학을 이해함에 있어서 헤켈(Hegel)을 중심으로 하는 관념주의 철학이나 키에르키고르(Kierkgaard)를 중심으로 하는 실존주의적 사고, 그리고 이미 그 당시에 난무했던 비평주의(Criticism)를 이해하지 않고서는 그의 말의 의도를 정확하게 파악 할 수 없을 것이다.

 

이러한 점은 이미 독자들에게 낯익은 모습이 되기는 해도, 우리들의 논의에서 세심한 관찰을 필요로 할 것이다. 시대적, 사회적 상황성(Social Context)을 고려한다는 것과 신학의(Theological content)내용성을 충실히 추구한다는 것은 현대신학을 수행해 나감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두 축을 이룬다.

 

이것은 위에서 언급한 내용과 뗄 수 없는 관계를 갖는다. 사상이나 관념의 문제를 제외하고서라도, 사회적(삶의) 상황의 문제를 떠나서는 신학의 경향들을 올바로 파악할 수 없다는 것은 큰 의미가 있다고 하겠는데, 왜냐하면, 신학이란 단순히 명제들을 암송함에 있는 것이 아니라, 말씀을 삶의 정황에로 투여하는 것이요, 또한 적용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형이상학적 주제들이 현실 상황을 무시 한 채 사변만을 일삼게 될 때, 그 주제들은 적어도 인간과 사회에 그 무언가를 요구하는 학문으로서의 힘을 잃는다.

 

전통적인 학문의 내용들이 그토록 아름다운 교리의 가르침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사회적 정황들에 대하여 힘을 지니고 있지 못한 반면에, 사회적 문제들(issues)에 강력한 대응을 하는 진보적 사고들이 영향을 주는 것은, 그 신학의 내용들의 성경적 토대의 옳고 그름을 떠나서, 그들은 이 삶의 정황에 힘차게 부딪치게 되기 때문이다.

 

신학의 내용성에 대한 문제는 뒤로 미룬다고 해도, 당시의 사회들이 당면하고있던 시대적 상황을 떠나서는 그 신학들이 올바른 평가될 수는 없다. 독일의 교회들이 겪고 있던 시대적 상황을 떠나서는 20세기의 유럽신학을 이해하기 힘들고, 1970대를 중심으로 한 한국의 정치 상황을 떠나서는 민중신학의 이해도 적절한 평가를 내릴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해방 신학의 경우도 그러하다. , 시대적인 조명 없이 어느 하나의 신학적 경향을 그 자체만으로서 분석한다는 것은 비평의 대상을 만드는 데에는 쉽겠지만, 그 상황 속에서 성경의 가르침을 적용하고자 하는 데에는 빈약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대라는 상황성은, 그것이 신학의 이름아래 해명을 요구한다면, 반드시 신학이라는 전제적 사고 아래에서 주어진 신적 계시의 조명을 받아야만 한다. 그것은 신학이 정치학이나 사회학, 심지어 심리학이나 철학과는 전혀 다른 진리적 명제의 근거를 수여 받아서 수행해 나가는 학문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신학이 그 내용성이라는 정체성(identity)을 상실해버리게 되면 신학은 모든 것을 포괄하여 평가해 내는 힘을 상실한 채 결국은 해체되는 지경에 이르게 될 수도 있게 된다.

 

따라서 정통신학으로서의 개혁주의 신학은 여타의 모든 학문(그리고 신학적 자유주의와 신 정통주의, 그리고 현대의 다양한 신학적 흐름들)들을 점검하고 비판하면서, 개혁주의 전통의 아름다운 신학적 유산을 신앙과 삶의 모습으로 확산시켜나가야 할 책임과 의무가 있는 것이다.

 

2) 언어 개념의 명료화 및 그 책임성

 

신학화의 작업이란 언어의 놀이(또는 말장난 : word-play)가 되어서는 결코 안 된다. 이 말에서 본인이 뜻하고자 하는 바는, 첫째로 언어는 그 사용에 있어서 독자들에게 그 개념에 대한 분명한 이해(또는, identification)를 하도록 해야만 한다는 것이요, 여기에서 주의해야 할 것은, 과연 그 개념들이 성경적 의미와 어느 정도 일치하느냐 하는 것이다. 현대신학을 이해함에 있어 가장 난제가 되는 것은 신학자들이 사용하는 언어와 그 언어들의 성경적 의미와 과연 일치를 하고있는가에 대한 물음일 것이다. 둘째로는, 언어의 사용이란 그것이 신학의 이름으로 수행되어질 때는, 단순한 활용이 아니라 이에 상응하는 삶의 태도를 요구한다는 것이다. 모든 신학적 진술이는 이에 상응하는 삶의 태도, 즉 경건성이 요구된다. 신학적 지식이란 단순히 지적 호기심을 만족시키는 앎의 내용이 아니라 절대자 앞에 살아가는 태도를 요구받는다.

 

신시적의 문제란 바로 이러한 면에서 기타의 지식론과는 구별이 된다. 이 두 가지 요소는 현대신학을 이해하거나 적어도 개혁주의라는 신학적 작업을 행함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전자는 오늘날 현대신학자들이 사용하는 언어의 개념을 혼돈하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요, 후자에 있어서 그 의미를 좀 더 설명한다면 신학적 작업에는 하나님의 은총을 향한 자아 결단과 경건성을 향한 자기투신의 의미를 가져야만 한다는 말이다.

 

신학적 모든 지식에는 그 지식이 수반하는 행위성이 있게된다. 그것은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는 성육신의 교리뿐만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지식에 상응하는 행위에 대한(그 언어 행위가 윤리, 도덕적 내용을 지녔건, 또는 단순히 사실적 내용을 지녔건 간에) 책임성을 가지게 된다는 말이다. 따라서 신학적 지식에는 비록 언어가 사용되되, 단순히 언어를 활용하고자 하는 도구적 의도를 넘어서서 그 신학적(또는 성경적)언어가 지시하는 의도를 읽어야 한다.

 

오늘날 수많은 신학적 언어 속에 있어야 할 이러한 내포적 의미를 상실하게 될 때, 신학적 세계는 혼돈을 겪지 않을 수 없게 될 뿐이요, 또한 신학은 언어의 혼돈으로 인하여, 그리고 사변적 흐름으로 인하여, 아무런 열매를 기대할 수 없게 될 뿐이다.

 

현대 신학을 이해함에 있어서 가장 혼란스러운 것은 모든 신학자들이 사용하는 언어들(어휘들)은 고정적인 반면에 그 언어가 내포하고 있는 의미는 학자들의 의도와 배경에 따라 상당한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언어의 의미를 밝히기 위해 우리는 때때로 지루할 정도의 설명을 덧붙여야 할 지경에 놓여있다.

 

물론 이것을 위해서는 이를 밝히고자하는 신학자 개개인의 개념정의가 있어야만 하며, 신학용어의 사전적 의미가 전제되어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따라서 우리들의 논의에서 언어가 내포하는 합축적인 의미를 연구하는 일이 필요하고 또한 각각의 신학자들이 고안해 내는 특징적인 언어들의 의미를 세심하게 이해하는 자세가 요구된다고 하겠다.

 

물론 그러한 용어들이 성경 속에서나 전통적 의미에서 흘러온 것일 지라도, 오늘날에 와서는 그 의미의 변질로 인하여 상당한 혼란을 주고 있음은 사실이요, 여기에서 더 나아가 각각의 신학자들은 나름대로의 용어를 통하여 자신의 입장이나 주장을 특징적으로 보여주는데 이러한 개념은 그들의 언어를 통해 전체적인 이해의 틀에 적용되기도 한다. 물론 이러한 용어들은 각각의 신학자들의 독특한 사상을 이해하는 첩경이 되기도 한다.

 

여기에 주의해야 할 것은, 신학자들이 고안해내는 용어들’(devising vocabularies)의 의미도 중요하지만, 그러한 용어들이 내포하고 있는 의미들이 과연 성경에서 의도하는 바로 그러한 의미인지를 조심스럽게 파악해야 할 것이요, 과연 현대의 신학자들은 그 개념들의 사용에 있어서 성경의 본래적 의미를 충실하게 따르고 있는지를 조심스럽게 판단해야 할 책임이 현대의 신앙인 들에게 있다는 점이다.

 

신학적 언어의 개념이 명료해지는 것은, 분석학자들이 시도하는 바와 같이 어떤 언어의 의미가 논리적 타당성을 지니고 있는 경우뿐만 아니라 그러한 언어사용이 일관성 내지 신념의 체계를 이루고 있을 때임을 인정해야 한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종교적 신앙고백이 단순한 형이상학적 진술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놀라운 힘을 발휘하게 되는 이유는, 그 언어의 의미를 따라 일관되게 살아감으로서 그 언어가 체험의 언어가 되며, 또한 삶의 진실성을 드러내도록 하는 원동력을 제공하게 때문이다. 따라서 개혁주의 신학을 행하는 사람들에게 성경의 언어가 제시하는 교리적 내용을 고백하는 것에서 더 나아가, 그 고백의 의미를 따라서 살아가는바 내면적 경건성과 이에 따르는 책임 있는 윤리성이 요구된다고 하겠다.

 

3) 인간 이해의 중요성

 

앞에서 지적한 바대로, 현대 신학의 주된 경향은 그 사고의 축이 어디에 있느냐에 달려있다. 물론 신학을 수행해나가는 주체는 인간이기에 신학 역시 인간중심의 학문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신학은 그 내용에 있어서 하나님에 관하여 논의하는 것은 사실이기는 하나 바로 그 하나님은 인간을 규정하고 있다.

 

여기에서 그 하나님은 인간을 규정하면서 인간 이해의 열쇠를 우리들에게 제공하기 때문에 그 하나님은 다만 인간이 탐구해야할 대상으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의 경외섬김을 요구하시는 존재임을 성경은 강조한다. 따라서 신학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이해라기 보다는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이해에 우선성을 둔다고 본다.

 

신학의 이름아래 인간의 중심적”(anthropo-centric)사고로서 하나님을 이해한다는 것은 신학적 사고의 많은 변화를 불러일으켜 왔다. 서구에 있어서 근대의 일반적인 사상이 전통적인 중세기 신중신의 사상을 벗어나 인간이성의 자율을 내세웠을 때에 앞으로의 신학적 흐름이 인간 이성중심의 사상으로 흐를 것을 예견이나 한 듯이, 현대에 이르러 신학의 중심축은 인간학적 신학(anthropo-centric theology)이 중심이 되어 가는 경향을 드러내게 되었다.

 

이러한 입장에서 이해된 현대신학의 경향은 종래에 논의된 신학적 용어들, 예컨대 거룩이나 엄위”. 또는 ’ ... 등은 다만 절대자의 속성을 드러내는 계시적 차원의 용어들로서만 이해되는 것이 아니라 다만 인간속에 잠재되어 있는 종교성을 드러내는 신성화의 의미로서 이해되고자 한다는 것이다.

 

신학이 종래의 모습을 따라 인간과 구별된 신 존재와 그에 대한 이해 방편으로서의 신성을 추구하고자 하는가에 따라 신학은 그 나름대로의 길을 행해 제각기 갈 뿐이다. 신학의 주재로서 인간 속에 내재된 일종의 신성을 이해하고자 하는 논의가 주류를 이룰 때 신학은 인간학으로 전락할 위험이 있으며, 더 나아가 신 이해에 대한 게시 중심의 사고를 떠날 때에도 신학은 인간중심(Anthropo-centric)의 학문으로서 신 중심(Theo-cnetic)의 독특성을 상실하게 될 뿐이다.

 

물론 인간학이라는 것도 신학의 한 분야를 따라 이해되어야만 하고 기독교적 학문에서는 이 방향이 분명히 존재하는 것도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의 신학적 사고는 인간 중신의 자율적 사고의 바탕 하에 상당히 많은 부분들을 수용하고 있는 현실에 처해있다. 더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이러한 인간이성과 자율성 위에 신학을 세우고자 한다는 점이다.

 

현대의 사상속에 깃들어 있는 이러한 인간성의 신뢰는, 넓은 의미에서 볼 때는 종교를 이간성의 또 다른 속박으로 보는 한편, 좁은 의미로는 기독교 신학(또는 신앙)에서의 계시 중심적 사고를 약화시킨 결과를 낳고 말았다. 따라서 개혁주의 신학의 최대 과제는 타락한 인간의 죄성을 입증해 내는 일이요, 동시에 무능하고 한계 지워진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하나님의 주권의 강조는 하나님의 계시 중심의 사상에로 그 근원을 두는 것이라 하겠다.

 

만일 이러한 인간성에 대한 스스로의 긍정성이 설정이 되고나면 삶의 중심은 당연히 내세가 아닌 현세에 중심을 두게 된다는 것은 자연스런 귀결이다. 따라서 대개의 신학적 진술들은 신 이해에 대한 것이 아니라 인간의 삶과 중심이 된 주제들이 판을 치게 된다(예컨대, 현대 신학에서 논의되는 역사 신학, 정치신학, 민중신학, 해방 신학, 여성 신학 등의 경우에서처럼)물론 신학이 가진 기능들 중에서 신에 대한 이해는 삶의 구조적 기능이나 삶의 상황성 또는 정황화(Contextualization)와 관련이 있게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 하겠으나, 오늘날의 신학적 사고는 유난히도 인간의 현세적 삶의 문제와 관련이 되어가고 있다는 지적은 결코 과장이 아니다.

 

물론 이러한 경향을 다만 부정적으로 평가하고자 하는 것이 유인대학 교수로서 현대 신학을 교육하는 의도는 아니다. 분명히 신학은 인간의 삶을 규정해주는 것인 고로 그 내용이 인간의 삶의 문제와 관련을 가져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신학이라는 자체의 내용성이 약화된 채, 삶의 정확성(Context)에만 관심을 둔다고 하는 것은 현대신학이 극복해야 할 당면문제가 되고 있는 것이요, 여기에서 개혁주의 신학의 당위성을 얻게 된다.

 

이상과 같은 논의가 가져다주는 영향은 현대신학의 흐름과 매우 밀접한 관련을 갖는다. 따라서 이러한 강조점의 변화를 이해한다는 것은 현대신학이 추구해 나가는 경향성을 평가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흐름은 제2장 현대 정신이란 무엇인가? 라는 강의에서 더 상세히 이루어지면서 적절한 평가를 받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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